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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의 유래와 세시풍속

by 폭신폭신이 2024. 2. 11.

설날의 유래와 세시 풍속

 

설은 한 해의 시작인 음력 1월 1일을 일컫는 말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명절이다. 원일·원단·정조 등 여러 명칭이 있다. 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달의 첫날, 한 해의 최초 명절이라는 의미도 있고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다. 삼국시대 문헌에서부터 설 명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의례, 민간신앙, 복식과 음식, 놀이 등 설 명절 관련 세시풍속 또한 풍성했다. 신성한 날이라는 신앙적 의미가 컸지만, 오늘날은 조상에 차례를 지내는 것만 남았고, 세시풍속 또한 특별한 장소에서만 남아 있다.

 

설의 유래

설은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신일(愼日)· 달도(怛忉)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 말은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이밖에 설을 양력 1월 1일 신정(新正)의 상대적 개념으로 구정(舊正)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에는 설을 낮춰 부르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설이란 용어를 나이를 헤아리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설을 한 번 쇠면 1년이며 두 번 쇠면 2년이 되는 이치를 따라 사람의 나이도 한 살씩 더 늘어난다. 결국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오늘날 ‘살’로 바뀌게 된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설이 새해 첫 달의 첫날, 아직 낯설어서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설을 설 명절이라고도 하나 하루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 명절은 대보름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설을 설 명절이라고 했다고 볼 수 있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 초하루는 천지가 개벽의 순간에 비유되어 최대의 날이 된다. 여기에 보름 명절은 정월 보름과 8월 보름이 각별한데 정월 보름은 첫 보름이라는 점에서 대보름 명절이라고 한다. 8월의 보름은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 국가에서 여름내 지은 농사의 수확을 앞둔 명절이어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

 

설의 역사적 변천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서에서 볼 수 있다. 『수서(隋書)』와『당서(唐書)』의 신라에 대한 기록은 왕권 국가다운 설날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즉 “매년 정월원단(元旦)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日月神)을 배례한다”라는 기록은 국가 형태의 설날 관습이 분명함을 알 수 있다.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진수가 쓴 역사서『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우리 문헌에도 설 명절과 관련된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고려사』에는 고려 9대 속절(俗節, 명절)로 원단(元旦, 정월 초하루 설날), 상원(上元, 정월 대보름), 상사(上巳, 후에 삼짇날이 됨),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 秋夕), 중구(重九), 팔관(八關), 동지(冬至)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원단·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했고 민간에서는 행하는 세시풍속이 다양했다.

 

설의 세시풍속

설날을 비롯하여 각 세시 명절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대체로 소망을 기원하는 의례적인 성격을 지닌다. 기원의 대상은 신(神)이나 무언가 ‘초월적인 힘’이 되기도 한다. 세시풍속은 농사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농경의례라고도 한다. 풍농의 기원과 예측, 풍흉을 점치는 점세(占歲), 농공과 풍농을 감사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어업과도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농사가 약화되면서 농경의례로서의 성격도 희박해졌다. 명절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은 정월, 설 명절 기간에 집중되어 있다. 이 기간에 세시풍속이 집중되는 까닭은 정월이 농한기인 데다 한 해가 시작되는 신성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기간에는 신과의 만남이 수월해져 인간의 기원 사항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다.

 

의례

설날 아침에는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종손이 중심이 되어 지내는데 4대조까지 모시고 5대조 이상은 시제 때 산소에서 모신다. 차례를 마치고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한다.

대보름에 가정의 평화와 풍요를 위한 용궁맞이를 한다. 『열양세시기』의 상원조에는 “깨끗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슴[어부시=漁鳧施]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부슴이란 대보름날에 그 해의 액막이를 위해서 조밥을 강물에 던져 고기가 먹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용궁맞이이다. 대보름날 저녁에 달이 뜨는 모습을 보며 절을 하며 소원을 기원하고 달의 모양과 색깔을 보고 한 해 농사의 점을 쳐 보기도 한다. 요즘도 서해안지역에서는 정초에 무당을 불러 풍어제를 크게 지낸다. 한 해 동안 무사하고 고기잡이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굿이다.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는 정월 대보름 무렵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낸다. 충남 서산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대보름날 볏가리를 세웠다가 2월 초하루에 털어낸다. 이는 놀이적인 성격도 있겠으나 애초에는 풍농을 위한 의례였다.

 

속신

설을 전후하여 세시풍속이 다양한 만큼 속신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설은 사실상 섣달그믐부터 시작된다고 할 만큼 그믐날 밤과 초하루는 직결되어 있다. 섣달그믐날 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다.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속신이 있기 때문이다. 설의 대표적 음식인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 수 없다는 속설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에 키가 작은 사람이 남의 집에 출입하면 ‘그해에 목화가 잘 자라지 않는다’하여 금하기도 한다. 복을 끌어들인다는 복조리 풍속도 속신으로 볼 수 있다.

설날 새벽에 까치 소리를 들으면 길조이고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불길하다고 한다. 설날 밤에 야광귀라는 귀신이 와서 신발을 신어보고 맞으면 신고 가는데 신발을 잃은 사람은 그 해는 재수 없다고 한다. 귀신을 쫓는 방법으로 체나 키를 지붕에 매달아 놓거나 저녁에 고추씨와 목화씨를 태워 독한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정초에 여자들은 널을 뛴다. 널을 뛰면 그 해에 발에 좀[무좀]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연날리기는 섣달그믐 무렵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한다. 대보름이 되면 ‘액연(厄鳶)’이라 하여 연 몸통이나 꼬리에 “송액(送厄)”, 또는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자를 써서 멀리 날려 보낸다.

 

복식과 음식

설날에 입는 옷을 설빔이라 한다. 『경도잡지』에는 남녀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장(歲粧),『열양세시기 』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새 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廕)이라 기록되어 있다. 설날에 색깔이 있는 옷, 특히 여자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다. 노랑이나 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는 오늘날까지도 설에 어린이들이 입는 가장 보편적인 옷이다.

설에 먹는 명절 식으로 우선 꼽히는 것은 떡국이다. 떡국의 기본 재료는 쌀로 만든 가래떡이다. 요즘에는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해오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떡국에는 만두를 빚어 넣기도 한다.

 

특징과 의의

설은 우선 한 해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특히 신성한 날이라는 신앙적인 의미도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구정과 신정이라는 신년을 두 번 맞는 문화를 만들었다. 설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오늘날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와 같은 인사말을 한다.

실상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신년 인사말은 전통적인 덕담이 아니라 새로 생긴 현대판 덕담이다.

설과 추석 무렵이면 ‘민족대이동’이 화두가 되고 있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어른’들이 자녀를 찾는 역류 현상도 형성되고 있지만 아직은 고향을 찾는 인구가 많다. 그래서 오늘날 설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것이다.

 

 [Lunar New Year’s Day]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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